1Km, 오늘도 삶을 짓는 중입니다.


괴안동 작업실

어느 해 봄, 부천 역곡역 굴다리 근처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작업실을 얻었다. 경인선과 경인로가 지나가는 건물 꼭대기였다. 경인선 철길에서는 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실 앞쪽으로 난 경인로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88번 버스는 새벽 4시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들을 일터로, 집으로 실어 날랐다. 작업실에서 500미터 떨어진 역곡역은 아침이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가 저녁 7시쯤 다시 동네로 뱉어놓았다.
청소차가 새벽을 깨우고, 첫차가 다니기 시작하면 공사 현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적하던 도로 주변은 물건을 싣고 내리는 트럭들로 붐비고, 가게 문이 열리고, 어느 순간 동네는 출근길에 나서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북적이던 아침이 지나고 한낮이 되면 이곳은 나이든 동네로 변한다. 동네는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한다. 분주함, 어지러움 속에 한편으로는 고요한, 시적 순간들이 공존한다.

역곡역

그런 동네에서 15년을 지냈다. 작은 작업실 창 너머로 공장이 생기고 사라지고 아파트가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동네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골목과 공장 풍경, 작업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몸짓과 뒷모습, 출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침의 열기가 좋았다. 타인의 삶의 패턴이 인상 깊게 느껴졌다. 이 분주한 공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위해 역곡역 앞으로 출근을 했다. 출근길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흘러갈 때 나는 멈춰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새기고 건물의 표면을 더듬어갔다. 건물의 타일과 벽돌의 닳고 닳은 표면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견뎌온 시간들, 가게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선을 만들고 물건과 도구들을 정리하며 만들어낸 일터의 질서들 속에서 일상의 치열함과 에너지를 느꼈다.
사람들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하루에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비슷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고, 장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직장에 나가고, 물건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사람들은 매일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버티면서 살고 있었다. 반복적이고 자잘한 일들이 쌓여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묵묵함이 아름다우면서 서글펐다.

건물의 초상

처음에는 상가나 공장 등 평범한 건물들의 외곽과 그 안의 텍스처를 따라가며 건물을 그렸다. 마치 보통 사람의 초상화처럼 일상에서 종종 만나는 건물들의 정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동네, 멋지게 잘 지어진 건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짓고 사는 건물을 그리고 싶었다.
타일과 벽돌의 집합, 그 틈새가 세월을 지나온 흔적, 시간 속에 풍화되어 구부러지고 찌그러지는 창과 문, 벽, 덧바른 벽지처럼 남아있는 예전 간판들, 창문의 시트들, 잔뜩 쌓인 물건들과 공구들, 먼지들을 그렸다. 거기에는 건물 안팎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질서들이 있었다. 늘어선 도구들과 가지런한 작업대 속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반듯하지 않고 좀 구부러지고 찌그러졌지만,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오랜 시간 지나다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공간들이 의미 있는 장소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공장이나 상가건물들은 독특한 형태이라기보다는 사각형, 반복적인 패턴의 창과 문 등이 대부분이었다. 창문에는 시시각각 수없이 많은 그림자와 빛, 주변의 형상들이 어른거렸다. 전에는 쓸모 없다고 느껴지던 것들, 보이지 않았던 것들, 자잘한 무늬들,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오히려 더욱 자세히 보게 되고 도시의 꼴을 점점 더 알게 되었고, 그리고 싶은 것을 엮다 보니 결국 삶의 무대인 길을 그리게 되었다.

1km의 거리

《1km》는 그림으로 그린 동네 관찰 일지다. 경인로와 경인선을 큰 줄기로 해서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 자동차나 기차들이 만들어낸 그물망 같은 동네 일상을 그렸다. 처음에는 동네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들로 시간과 공간이 중첩된 일터의 지도, 삶의 노동의 지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네니까 다 안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림을 그릴수록 동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늘었다. 인식하는 공간의 층위가 많아져서 건물과 거리, 내부 공간의 깊이가 확장되었다. 건물과 도로와 만나는 경계, 바닥의 무늬, 주변의 소리 등에 예민해졌다. 도시는 여러 가지 형태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간섭하고 분절하고 있었다. 모자이크를 붙여가듯이 도시의 구조를 더듬고 파편들을 연결했다.
동네가 살아 숨 쉬는 장소로 느껴지는 것은 이 안에서 삶이 유기적으로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깨우는 청소차, 새벽 버스로 출근하는 사람들, 공사장으로 가는 사람들과 폐지 줍는 노인들의 모습 등 동네를 지나면서 불쑥 만나는 것들은 그려야 할 목록에 올라갔다. 그 사이 재건축하는 곳이 늘면서 작은 철공소나 철강회사들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생겨났다. 도시는 끝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그 변화 과정과 다양한 시기의 모습이 중첩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보니 그 거리가 1km 남짓이었다. 사람들이 도보로 움직이면서 생활하는 생활권이 대개는 1km 반경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1km 프로젝트, 그 이후 사람들이 매일 출근을 하며 삶과 일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나 또한 하루하루를 쌓아가며 기록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이 많지 않아서 때로는 작업의 의미나 방향을 놓치거나 고립감을 느끼는 일도 많았다. 작업하는 중에도 동네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어서 기록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살면서 겪었던 무수한 경험, 역사적 사건,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로 숨쉬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의도치 않아도 공간의 공기를 우리는 함께 마시고 있다. 현재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대한 서사는 나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무관심할 수는 있어도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무관하지 않음 자체가 작업의 주된 표현 주제였다는 것을 지금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생의 한때를 그릴 수 있도록 내보여주셨던, 1km에서 삶을 짓고 있는 모든 이웃들, 그리고 작업실에 출근할 이유를 만들어 준 살구, 열무, 경인로 주변에서 삶을 함께 이어온 가족들과 무용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 14층 꼭대기 작업실
  • 2온수역 방향으로 가는 경인선 기찻길
  • 3기찻길 옆 회색 담장이 이어지는 뒷골목
  • 4빨간 벽돌로 된 공장 건물
  • 5매일 아침 콜라를 싣고 동네를 누비는 빨간 트럭
  • 6역곡 북부 방향으로 통하는 기찻길 아래 굴다리
  • 7역곡상상시장
  • 8서울 방향 경인로
  • 9버스 정류장
  • 10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
  • 11수도, 배관자재 집합소
  • 12새벽 4시 88번이 도착하는 버스 정류장
  • 13공장이 모여있던 곳, 현재는 아파트
  • 14동네를 빙 둘러가는 산책길
  • 15동네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역곡남부역 사거리
  • 16역곡역
  • 17역곡북부역 사거리
  • 18은행, 우체국, 밥 먹으러 가는 길
  • 19영화보러 가는 곳
  • 20동네 답사 중 잠시 쉬어가는 카페들
  • 21초상을 그렸던 철공소 자리
  • 22다양한 기계음이 가득한 유리공장 근처
  • 23인천 방향으로 가는 경인로
  • 24페인트붓 가게가 있는 곳
  • 25소사역, 부천역 방향으로 가는 경인선 기찻길
  • 26철물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
김 은 희
공간에 새겨진 삶의 무늬와 결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서울시립대 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습니다.2015년부터 지하철 1호선 역곡역 주변 오래된 건물과 변화하는 길의 모습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조로운 공간들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짓는 과정, 하루를 살아나가는 모든 활동, 그 반복적인 리듬이 만들어내는 것이 도시의 형태라는 것을 그림을 그리면서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도시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 있는 온기를 찾아 그림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2016년 건물의 초상을 담은 작품들로 볼로냐국제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이 되었고 전통 한옥의 공간 곳곳 아름다움을 담아낸 《우리가 사는 한옥》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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